1. 테러와 전쟁 위기를 부른 원인에 대한 역사적 고찰
이번 테러 사태를 야기한 사회적 모순들과 토대를 분석하는 것은 문제를
진지하게 탐색하여 해결책을 이끌어냄으로써 견고하고 확신에 찬 중단없는 행동에
나서고자 하는 진지한 투사들의 가장 기본적인 정치적 의무다. 이 의무에 충실하게
복무하지 않는 세력은 도덕적 외침, 저주, 불평, 낭만적 선언으로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고 믿는 떠벌이들의 수준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이들은 모든 대안을
늘어놓지만, 거기서 거품을 빼면 남는 것은 한 방울도 목을 축일 수 없는 '텅빈
식수통'일 뿐이다.
그런데 뉴욕 테러와 중동 전쟁에 대한 토론은 지금껏 순전히 유럽과 미국, 일본,
남한,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자본가계급 정부를 한편으로 하고, 인도주의,
평화주의 단체들과 노동조합 관료들, 그리고 중도주의적 조직들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이루어져왔다. 자본가계급의 의지를 대변하는
부르주아 정부들은 테러를 '정신착란, 인류에 대한 도발, 야만적 발광' 정도로
규정하면서, '테러에 대항한 전쟁'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에 대해 반대하며 강한
우려를 표명하는 당파들은 다음을 주장한다. 아무런 정치적 탐색도 없이 단지
휴머너티에 호소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는 엠네스
티(국제사면위원회) 평화주의자들은 "희생자들에 대한 국제 사회의 연대가 보복
공격이 아니라 테러 책임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슬픈
목소리로 호소한다. 민주노총 지도부를 비롯해 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사회민주당, 노동당과 같은 부르주아 체제에 갇힌 순한 양들은 '테러 응징은
옳지만 전쟁에는 반대한다. 전쟁 기도를 중단하라!'고 자본가 정부에 요구한다.
가령 민주노총 지도부가 참여하고 있는 민족화해자주통일협의회는 "미국은 보복
공격 계획을 철회하고 힘에 의한 세계패권정책을 중단하라"고 외친다. 사회당(구
청년진보당)이나 노동자의 힘 류의 중도주의 조직들 또한 "희생자의 명복을
바라며, 반복되는 보복행위를 경계한다"(사회당 성명서)는 식의 무기력한 요구에만
머물면서, 기껏해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과 보복, 그리고 다시 전쟁이라는
악순환을 끊어낼 세계 민중들의 보편적 가치 평화다"(학생연대회의 성명서)고
덧붙일 뿐이다.
이런 성명서들이 하등 쓸모없으며, 가엾은 외침에 불과한 이유, 이에 비해
부시를 비롯한 자본주의 지배자들의 성명서들이 정치적으로 가치 있는 이유는
단순히 평화를 호소하는 성명서들은 전혀 아무런 영향력도, 실현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의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떠벌임에 불과한 반면
자본주의 지배자들의 성명서는 행동으로 집행되는 단호한 결의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 일본, 남한을 비롯한 세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의 상황,
그리고 세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의식과 국제주의적 단결력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있는 한, 우리는 자본가 정부에게 자본가계급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행동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들은 간단히 우리의 요구를 묵살할 것이며, 자기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조금의 굽힘도 없이 관철시킬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한
노동자 투사들이 현재 해야 할 일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테러를 잉태한
아버지인 제국주의적 착취와 억압, 그리고 테러의 어머니인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중동의 조류들에 맞선 세계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적 단결과 이 단결이 취해야 할
혁명적 방향에 대해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 뒤에 우리의 힘에 조응하는 바대로,
가능한 모든 투쟁과 선전 선동 연대 행동을 조직하는 데 체계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뉴욕타임즈는 13일자 신문에서 "미국이 치밀했던 테러 공격에 대한 강력 대응을
논의하기 앞서 얼마나 반미 감정이 뿌리 깊어 이토록 잔혹한 행위가 가능했는지를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실제로 수백명이 탑승한 비행기를
폭탄으로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자기의 생명조차 의연히 바치는 그런 테러는
거대한 사회적 뿌리, 특히 수십년, 수백년간 조성된 역사적 원한, 그리고 부모,
형제,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이 야기하는 엄청난 분노와 증오 없이는 절대 일어날
수 없다. 그 뿌리를 살펴보지 않고 테러리스트들을 단순히 살인마로 비난하는 것은
가벼움의 극치일 것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테러리즘에 반대한다는 이름하에 자신이
낳은 '사생아'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비열한 세계 자본가계급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세계 부르주아 계급과 중동의 퇴행적 조류들이
저지르고 있는 온갖 범죄와 억압, 야만적 행동에 대해 어떤 책임도 없는
노동자계급만이 그러한 문제들의 역사적 기초와 근본 원인들을 완전히 정하고
공평하게 다룰 수 있으며, 진정한 해결책을 향해 인류를 이끌 수 있다. 우리는
우선 이번 뉴욕 테러를 야기한 중동 문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데서 출발할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 사회주의의 입장은 오직 개별적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탐구하고 그것의 역사적 추이를 추적하는 진지한 탐색을
통해서만 '실제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동 문제는 남한 노동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에게 상당히 낯선
영역에 속한다. 언론의 국제면을 가장 빈번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중동 문제임에도 남한 투사들은 이에 대해 불명료한 견해만을 갖고 있거나
피상적인 이해에만 머물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국제주의자를 자처하는
사회주의자들조차도 구체적이고 역사적이며 무엇보다 노동자계급적인 당파적
이해에 충분히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진실로 국제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전세계 노동자계급의 공동의 이해를 대변하고 모든 나라의 노동자계급을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단단하게 묶어세우기 위해서는 그런
취약성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국제주의자라는 이름은 단지
'그렇게 되겠다'는 희망을 표현할 뿐 명확한 견해와 굳건한 실천을 통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명예가 되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서 사회주의자라는 이름은
남한 노동자계급을 전세계 노동자계급 운동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국제
노동자계급의 이해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며, 일국의 울타리를 넘어서 국제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 사고하고 투쟁하는 진실로 국제주의적 계급으로 우뚝
세워내는 실천을 통해 입증되는 빛나는 이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임무에
부응하기 위해서, 남한 사회주의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중동 문제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역사적인 분석에 매진해야 하며,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을
수미일관되게 적용함으로써 '실천의 전체적인 노선' 그리고 '당면의 정치적
임무'을 명확하게 확립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급하게 우리의 결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중동 문제에 대한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분석에서 출발할 것이며,
그로부터 우리의 당면 정치적 임무에 대한 논의로 상승할 것이다.
1970년대 초까지의 중동 문제
원래 1800년대와 1900년대 초에 터키 오스만제국의 지배에 맞선 투쟁 과정에서
탄생했던 아랍민족주의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분할통치에 나서자 반서구 제국주의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주의 지배자들은 1916년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에서 중동 지역 대부분의 분할 지배를 결정했다. 결국 1차,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단일한 중동 국가 건설운동"은 수포로 돌아갔다.
중동은 석유 자원에 대한 지배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의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면서 사우디,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알제리, 이집트 등 10여개의 국가로 분할되어 나갔다. 중동의
역사적 유산과 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가운데, 오
직 제국주의 나라들의 이익을 위해 국경선이 그어졌고 국가가 세워졌다. 이렇게
되자 '통일 아랍 국가 수립'이라는 이전 시기의 목표는 "제국주의로부터 중동 각
나라의 독립"이라는 목표로 하향 조정되었는데, 이에 기반한 민족해방운동이
본격화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2차 세계대전 뒤에 민족해방운동의 열풍이 중동 전역에 불었다.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이란, 이라크처럼 완전한 형태건, 아니면 레바논이나 사우디처럼 조금은
불완전한 형태이건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민족해방운동의 승리가 잇따랐다.
식민지들이 독립 국가로 탈바꿈해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원래 아랍인들이 추구했던
중동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 아랍 공화국은 아니었다. 민족 독립은 과거
제국주의자들이 그어놓은 식민지 분할선을 따라 진행되었고, 그 결과 10여개
이상의 독립적인 국가들이 중동에 난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석유
자원을 무기로 서구 열강과 겨룰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제국주의 나라가 중동에
탄생하는 것을 막고자 했던 서구 제국주의 나라들의 공통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 아랍 공화국에서 권력을 분점하기 보다는
독립적인 소규모 국가들 속에서 권력을 독점하기를 희망했던 중동 각 나라
지배자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중동에서 통일 아랍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목표로 하는 운동 단계, 그리고 민족해방운동의
단계는 저물게 되었으며, 이제 이들 나라들은 중동의 패권을 둘러싸고 서로
충돌하거나, 상호 독립적인 행보를 가속화하는 자본주의 나라들로 변모했고 또한
급속히 변모하고 있는 중이다. 아랍 통일 운동과 민족해방혁명을 넘어서서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가 중동에도 점차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 지배가 남긴 비극적 유산들
79년 미국의 간접적 지배 하에 있던 이란 샤 왕정이 호메이니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되고 80년대에는 소련이 점령한 아프카니스탄까지 민족해방을 이룸으로써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을 제외한 모든 중동 나라들에서 독립이
쟁취되었지만, 제국주의 나라들의 간섭과 개입 그리고 아직 자신의 각인을 찍을 수
없을 만큼 지극히 허약했던 중동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의해 초래된, 불완전한
민주주의 혁명은 중동 전역에 자신의 자취를 남겼다. 중동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최대치였고, 거대한 시장을 기반으로 가장 빠르게 자본주의적 관계들 --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거대한 계급투쟁을 낳는 바로 그 관계들 -- 을
확산시킴으로써 미래의 사회주의 혁명의 도래를 가장 앞당길 수 있는 수단이었던
통일 아랍 민주주의 공화국은 명백히 좌절되었다. 서로 독립적으로 자본주의로
전진하게 된 중동의 각 나라들은 원래부터 존재했던 후진성, 낙후성과 함께 좁은
시장 관계들이 가하는 제약 때문에 점차적으로만 자본주의적 관계들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것이 미쳤고, 지금도 미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부정적 영향력은 다름
아니라 노동자계급 대 자본가계급이라는 현대 사회의 계급투쟁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으면서, 구래의 역사적 후진성의 온갖 낡은 먼지들이 중동 전역을
뒤덮었다는 점에 있다.
레바논은 그것의 가장 비극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시리아 분할 정책의 일환으로 기독교도들이 많던 베이루트를 중심으로
레바논을 인위적으로 건설했다. 그러나 1952년 이집트 민족혁명으로 아랍주의가
성장하면서 기독교도들과 이슬람교도들 사이의 내전이 발생했고, 그 뒤 지속적으로
격화된 내전으로 이 조그마한 레바논조차 기독교 지구와 이슬람 지구로
분단되었다. 이후 미국의 개입에 의해 내전이 재개된 레바논은 끊임없는 내전으로
점철된 고난과 가난, 전쟁의 땅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민주주의 혁명이 일관되게 전진하지 못한 결과로서, 그리고 미국의
비호 때문에 일부 나라들(가령 사우디아라비아나 요르단, 쿠웨이트)에서 지금껏
유지되고 있는 왕정 지배를 들 수 있다. 또한 민족해방 그리고 왕정 체제 타도는
이뤄졌지만 민주주의 혁명과 긴밀하게 결합되지 못한 이라크, 이란,
아프카니스탄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동 나라들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모든 중동
나라들에서 여전히 자유로운 결사와 시위, 집회, 사상의 자유가 거의 조금도
보장되고 있지 않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과 노동자 운동의 형성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다.
범 아랍 통일국가 건설을 내건 갖가지 조류들의 등장
제국주의가 아랍 인민들이 스스로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할 권리를
박탈한 것이 야기한 가장 불행한 유산은 아마도 '범 아랍 국가'를 제창하면서 낡은
조류들이 일시적으로 생명력을 강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수립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현 시점에서는 더 이상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질 수 없는 '아랍
통일 국가' 수립을 여전히 목표로 추구하고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할 용의가
되어 있는 집단들이 탄생하고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수니파 이슬람 사상에 기초한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과 이 정권의 주축인 '바트
사회당'(대개 바트당으로 불린다), 이란의 호메이니 시아파 이슬람주의 정권,
그리고 범이슬람주의를 표방하는 아프카니스탄 탈래반 정권이 바로 그 예에
해당된다.
현 시점에서 '아랍 통일 국가 수립'은 진보적인 것이 아니다. 추상적으로 볼 때,
불과 수백만 정도만을 포괄하고 있는 여러 소규모 국가들(가령 리비아, 시리아,
레바논, 쿠웨이트)로 중동이 분열된 상황에 비한다면 통일 아랍 국가는 진보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커다란 시장
을 제공하고 생산의 연관을 발전시켜 자본주의로의 발전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가장
빠른 기간 동안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계급 사이의 전면적 투쟁이 중동에서 일정에
오르도록 만들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현대적인 물질적 기초들을
형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아랍 통일 국가는 유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정교
일체, 민주주의적 권리의 유린, 인종주의, 민족주의, 테러리즘 따위의 낡은
장애물들을 가장 빠르게 붕괴시킬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추상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현재 중동이 현재 놓여 있는 객관적
관계들 속에서 문제를 고찰한다면 결론은 정반대로 나타난다. 역사는 무한히
기회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아랍 통일 국가가 진보적 성격을 띨 수 있었던 역사적
시기는 이미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통일 아랍 국가는 전혀 실현될 수 없거나
아니면 세계 사회주의 공화국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중간적 단계로서 잠시 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랍 통일 국가 수립이 불가능한 이유는 이미 여러 중동
나라들에서 독자적인 자본주의의 길이 개시되었으며, 그 결과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만일 이런
원심력을 극복하면서 통일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전쟁을
야기하고 종교와 인종주의, 민족주의, 테러리즘, 독재 등의 온갖 낡은 퇴적물들을
강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현재 중동이 객관적으로 놓여 있는 관계들을
고찰하면,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구심력은 오로지 "중동 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통해서만 탄생할 수 있
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일 아랍 국가 건설'을 모토로 내걸고 있는 나라들(이들
나라들은 중동의 패권을 다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국가들로서 이란, 이라크가
나라의 크기, 인구, 산업의 발전 정도, 군사력 등에서 볼 때 거기에 해당하는
유일한 두 나라이다)의 지배자들을 휘감고 있는 추진력
은 '중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이다. 이를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 증거는 '왕정
타도와 범 이슬람 통일 공화국 수립'을 공통적으로 내걸었고 혁명 정부를 표방했던
이라크 사담 후세인과 이란의 호메이니가 벌인 "이란, 이라크 전쟁"이다. '아랍
통일 국가' 수립 요구가 중동 전역에 패권을 확장하기 위한 신생 새끼 제국주의
국가들(이란, 이라크)의 이데올로기적 장식물일 뿐이라는 사실은 동일한 수니파
이슬람 교리와 바트주의 정치에 근거해 '하나의 범 아랍당'을 형성하고 있던
이라크와 시리아의 '바트당'이 쿠데타를 통해 양 국가에서 집권하자마자 서로
갈등하면서 분열했고, 적대적 세력으로 남게 된 역사가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또한 중동의 여러 소규모 국가들의 경우에도, 통일 아랍 국가 건설에 지극히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미국의 지배에도 반대하지만, 이란과 이라크의
지배도 명백히 거부한다. 비동맹 자주 외교 노선은 이들 소규모 국가들에서
탄생하고 있는 민족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한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에 맞선 아랍의 단결에 찬성했던 이들은 석유를
무기로 군사력을 급속히 팽창시키면서 "아랍인의 옷을 걸치고 있을 뿐인 또다른
제국주의 국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이란과 이라크로부터 거대한 위협을
느꼈고, 그 결과 일부는 미국과의 동맹의 그늘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그 본질적인
입장이야 어떻건 왕정 체제 타도를 내건 이라크 바트당, 이란 호메이니 정부의
지배권이 강화되는 것에 거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사우디, 쿠웨이트, 요르단의
왕정 체제만이 아니라 이미 왕정 체제가 붕괴된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심지어는
리비아까지 미국의 원조와 보호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다. 아랍 통일 국가는
이제 불가능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지만 만일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 아랍 통일 국가가
떠오른다면 그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만 가능해질 것이다. 하나는 중동 민족 국가들
사이의 피비린내나는 전쟁 -- 그것도 아랍 통일이라는 명분아래 진행되는 전쟁 --
을 통해 이란 혹은 이라크가 중동 지역을 군사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은 유럽과 미국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들이 자신들의 지배권을 약화시키는
이런 병합을 두고 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의 하나 그것이 이뤄지는 경우에도
그것은 전쟁과 종교 분파 갈등, 독재 등의 반동적 요소들을 강화할 것이기에 전혀
진보적 성격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동 전체 지역에서 순조롭게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그리하여 자본주의적으로 성숙된 부르주아지가 모든 중동
나라들에서 지배권을 쟁취한 뒤, 이들이 (마치 유럽 연합과 한반도에서 지금
모색되고 있는 것처럼) 세계 자본주의 경쟁에서 더 나은 지위를 획득하고, 더
폭넓은 자본주의 생산을 확보하기 위해 '하나의 시장', 즉 하나의 연방 공화국
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전자에 비해 후자가 훨씬 더 평화롭고 합리적인 길이지만,
그럼에도 양자 모두 '자본주의적 길'이다. 어떤 경우이건 중동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인민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개선될 수 없을 것이며, 착취와 억압, 민족적
종교적 갈등 또한 그 근본에서 조금도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통일 아랍 국가 형성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지금 아랍은 뒤로 물러서 있는
듯하다. 그러나 사실 중동은 지금 거대하고 근본적인 혁명의 출발점을, 요컨대
그것에 기반해야만 현대의 혁명이 진실한 것으로 되는 조건들과 사회적
관계들(다름 아닌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대립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관계들)을
이제 비로소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다. 중동에서 부르주아 민족혁명들은 60년대와
70년대, 부분적으로는 80년대를 거쳐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맹렬히 돌진했다. 그
극적 효과들에 파묻혀 중동의 민족 혁명들은 서로 자신을 대표로 내세우려 하며,
사람들은 민족 혁명이란 불꽃의 찬란함에 눈이 멀어버렸다. 그러나 이 폭죽은
수명이 짧았고, 얼마 안 가서 곧장 그 정점에 도달해 버린 뒤 급속하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제 일국, 아니 아랍 통일 국가조차도 너무 좁다. 그것 모두는 새로운
사회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오직 세계적 관계들, 세계적 통합만이 중동
노동자계급을 포함해 모든 나라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무대가 될 수 있다. 이
측면에서 우리는 이
후 중동 문제를 접근할 것이다.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스라엘 문제
제국주의 지배가 남긴 가장 거대한 비극이자, 지금껏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제는 다름 아니라 아직껏 민족적 독립을 충분하게 쟁취하지 못한 유일한 중동
민족인 "팔레스타인"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를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실을 따라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기원전 63년 유대국이 로마에 멸망당하자 유태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기독교인을 박해한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지역에서 대거 추방당하면서
이들은 러시아와 유럽 각지로 흩어졌다. 추방을 피한 일부는 살아남기 위해, 서기
70년 이슬람으로 개종해 아랍인화되었다. 그 이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은 약 2000년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생활하는 터전이 되었다. 1917년을
보면 제국주의 전쟁을 피해 약간씩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지만 이들은
팔레스타인 인구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문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아랍인과 유태인이
원래부터 대립적이고 원한에 사무친 관계였기에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약 2000년
동안 이들 두 인종은 아무런 갈등 없이(최소한 갈등은 인종적 경계선을 따라
발생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다. 세계 전역으로 흩어진
유태인들 또한 2000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미 민족적 정체성을 잃고 오직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공통성에 의해서만 연결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시온주의(구
영토인 예루살렘으로의 유태인 복귀운동)운동은 거의 아무런 영향력도 없었으며,
압도적 다수 유태인들이 자신들이 살아온 민족, 나라들에 거의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유태인으로서 자신을 간주하기보다는 독일인, 영국인, 러시아인,
프랑스인으로 자신을 간주했다. 이들은 유럽과 미국 문명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면서 세계 속으로 동화되었다.
분란과 갈등, 대립, 증오, 원한의 씨앗은 제국주의자들이 뿌린 것이었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렸다.
제국주의는 인종주의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고, 희생양이 된 유태인들은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 유럽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이 러시아와 유럽 제국주의의 인종차별 정책에 견디지 못해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시온주의운동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은 발포어 선언이었다. 미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태인들을 회유하여 미국을 전쟁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며,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로 통하는 경로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친 영국 국가를 세울 필요가
있었던 영국은 '발포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의 나라를
건설해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때부터 유태인의 이주는 급증하여 1933년까지
13만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 이런 갑작스런 대량의 이주는 토착
팔레스타인들과의 크고 작은 분쟁을 야기하기 시작했다. 1930년 나치의 야만적인
유태인 학살은 시온주의에 불을 붙였다. 나치의 가스실에서 한꺼번에 수천명,
수만명 씩 대량으로 죽어나가고, 화학무기 실험과 '인종 청소'의 대상이 되었던
유태인들에게 유럽은 더 이상 고국이 아니었다. 이들은 죽음과 파멸, 인종주의의
대광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시온주의는
그들에게 희망을 제공했다. 그들은 '유태인의 독립 국가 건설'만이 대재앙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팔레스타인으로 순식간에 45만명의 유태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유태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서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들과의 공존 대신에 팔레스타인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했다. 마찰은 거센 충돌로 성장했다. 이런 와중에서 UN은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 분할결의안'을 가결했다. 이 때 구 팔레스타인 영토의 약
1/4이 이스라엘에 할당되었고, 이를 근거로 유태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국가를
공식적으로 수립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국가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자치권과
독립권을 보호하고, 나아가서 유태인과 팔레스타인 민중의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대신 '자국 영토 보호'라는 이름으로 팔레스타인 추방 정책과 구 팔레스타인 지역
전역으로 확대되는 군사적 강점 정책에 의지했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땅은 내전과
유혈테러가 휩쓰는 고난의 지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시온주의에 입각한
이스라엘 지배자들의 국토 확장 기도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1948년
건국과 함께 이스라엘은 원래 UN 결의안에도 팔레스타인 영토라고 간주된 요르단강
서안
과 가자지구를 침공, 식민지로 만든 후 여기에 유태인 이주 정책을 접목했다. 당시
아직 중동 지역에 강력한 거점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미국은 이스라엘을
교두보로 삼기 위해 그것을 승인했고, 소련 정부 또한 하루 뒤에 그것을 승인했다.
이에 맞선 보복으로, 침공 다음날인 48년 5월 15일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이라크 군이 동맹해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제1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이스라엘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런 혼란 과정에서 약 94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그들의
점령지에서 탈출해 중동 각지를 떠도는 난민이 되었다. 기원전 63년에 발발한
유태인들의 엑소더스(대탈주)가 이제 2000년이 지난 뒤에 유태인들에 의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다. 이제 팔레스타인 지역은 전쟁과 끊이지 않는
테러의 가장 강력한 진앙지가 되었다. 피해자의 지위에서 가해자의 지위로
바뀌었을 뿐 이스라엘의 유태인들은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뒤 56년,
67년, 73년에 2차, 3차, 4차 중동 전쟁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지구상에서 가장
낙후되어 있고 가장 문명이 덜 발달한 중동 국가들에 대항한 전쟁에서 강력한
군사력과 기술력으로 무장한 이스라엘은 연이어 승리했다. 그들은 기존 점령지에
대한 지배를 강
화했음은 물론 부분적으로 점령지를 확대시켰다. 영국을 대신하여 세계 지배를
추진해 온 미국이 중동지역을 지배하는 교두보이자 (아랍주의와 반미주의가
성장하는 최악의 국면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최후의 보루로 이스라엘을 이용하고자
이를 지원했던 것 또한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1973년에 일어난 제4차 중동 전쟁은 상당히 변화된 상황을 보여주었다.
석유 자원을 수단으로 자본주의를 점차 발전시키기 시작했고, 석유를 판 돈으로
대량의 무기를 사들였을 뿐만 아니라 석유를 압력수단으로 삼아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 중동 국가들은
연합해 시나위 반도를 탈환한 가운데 휴전을 맺을 수 있었다. 이 전쟁은 중동
국가들이 여전히 이스라엘을 압도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제 이스라엘이
과거처럼 일방적인 승리를 구가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수십년간 짓누르고 있는 과도한 국방비가 가하는 경제적 압력 때문에 이스라엘은
전쟁에 대해 커다란 부담을 갖게 되었다. 이제 중동 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팽팽한 균형 상태가 조성되었고, 이것은 전쟁 억지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후
다루겠지만, 5차 중동 전쟁은 이스라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에 의해
터져나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대립은 비단 팔레스타인 지역만이 아니라 중동
전체를 짓누르는 엄청난 무게의 바위덩이다. 이 거대한 바위가 버티고 있는 한,
팔레스타인 지역과 중동에서 민족주의, 인종주의, 테러주의, 종교주의의 광풍을
잠재우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엄청난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그런데 그것의 해결책은 반드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독립 국가 수립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팔레스타인 땅으로부터 이스라엘 유태인들을 추방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끊임없는 악순환의 고리로 중동 전역을 꽁꽁 묶어버려
어떤 전진도, 다른 무엇보다도 대중적 규모의 사회주의 노동자 운동이 (이스라엘과
중동 전역에서) 탄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중동과
서구 제국주의 지배자들의 체제를 보호하는 강력한 버팀목이 될 뿐이다.
이스라엘 지배자들 때문에 수천년 살아왔던 생존의 터전에서 강제로 쫓겨나고,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지배자들의 억압과 감시, 착취에
신음하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독립 운동이 정당한 것이라면, 히틀러 나찌의
가스실에서 수만명의 인명이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단 번에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 생존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설립한
자신의 국가(이스라엘)에 대해 집착하는 것 또한 정당하다. 그것들 모두는 그들의
의지에 의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지배자들에 의해 강요된 '역사의
그늘'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중동, 나아가서 전세계 노동자계급의
일치단결한 투쟁만이 이 그늘을 말끔이 지울 수 있다. 그 때 유태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은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서 형제가 되어 진군할 것이다. 문제는 단
번에 풀릴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다른 장에서 체계적으로 다룰 것이다.
종교의 영향력 확산과 퇴행적인 조류들의 성장
제국주의 지배가 남긴 암울한 역사적 유산 중 하나로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다름 아닌 "이슬람 종교의 부흥과 지배 강화"다. 맑스는 종교에 대해 "종교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종교는 한편으로 현실에서의 불행의 표현이자,
현실에서의 불행에 대한 항의 표시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가난하고 박해받는
인간들)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을 상실해버린 현실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고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는 그 때로부터
15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전혀 빛을 잃지 않는 정확한 정의인데, 그것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예로는 중동의 이슬람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루터 이래 기독교가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심지어는 '직업 소명설'과
같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 매진하는 것이 당신들 자본가에게 신이 부여한
임무이며, 죽어라고 쥐어짜이면서도 반항하지 않고 복종하는 것이 당신들
노동자에게 신이 부여한 임무다"는 극악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한 반면,
이슬람교는 고대 이래 전수된 교조적 원리 그대로 고수되고 있었다. 그것은 동양
문명, 특히 중동 문명을 특징짓는, 수천년이 지나도록 보존되어온 '보수적이고
정체된' 낡은 사회적 관계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슬람 교리를 아래로부터
떠받치고 있는 중동 사회의 사회적 제관계들이 고대 이래 거의 변모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서구 사회의 지속적인 변화를 반영해 끊임없이 교리를
변경시켜왔던 기독교에 비해 이슬람교는 더욱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종교를
대표한다.
결국 제국주의 지배 이래 외부로부터 가해진 충격들, 그리고 점차 전근대적인
낡은 관계들이 해체되어감에 따라 이슬람교는 몰락의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종교가 갖는 생명력이 얼마나 긴 지가 다시 한 번 입증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외부로부터 가해진 충격은 전근대적 관계들을 대체하면서 현대적 관계들 --
생산력과 자본 임노동 관계의 발전 -- 을 양산하는 진보적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단지 자원을 수탈하기만 하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중동에서 발전하는 것을 겁내고
자신이 조종하기 적합한 왕정 체제를 보호하는 '극악한 반동화된 제국주의'였다.
그래서 전근대적 관계들은 해체되었지만 새로운 현대적 관계들은 아직 충분하게
탄생할 수 없었다. 이는 사회의 몰락과 퇴행을 뜻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미치는
가장 파멸적인 결과는 당연히 기층 민중들을 겨누었다. 이렇게 되자 가난하고
박해받는 중동 인민들 속에서 한숨이 늘어나고, 무정한 세상에서 의탁할 수 있는
감정의 낙원에 대한 갈망이 성장했으며, 희망이 없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안의 정신 세계가 필요해졌다. 종교라는 아편이 인민을 사로잡게 되었다. 아니
희망 없이 저주받아 떠도는 인민들이 아편을 붙잡았다.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 정책은 중동 전역에서 낡은 이슬람
종교가 생명을 연장하고, 때때로 지배권을 넓히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반팔레스타인 정책(시온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하고 있다)과 극단적인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의 '이스라엘 추방 정책'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여기에
유대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 분쟁이 맞물리면서 중동 전역에 이슬람원리주의
운동이 발전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형성되었다. 덧붙여서 고찰할 것은 '범 아랍
통일운동'이 바로 이 이슬람원리주의 종교에서 그 이데올로기적 표현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슬람 종교의 부흥 뒤에 감추어진 내용들과 함께, '종교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가 1차적으로는 정치적 영역에, 2차적으로는 경제적
토대에 미치는 반작용'의 문제를 검토해야만 한다.
역사는 인간들이 만드는 것이지만, 인간은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으며, 오직 자신이 역사적으로 물려받은 재료들을 바탕으로 해서만 빚어낼 수
있다. 만일 인간이 개척하는 미래의 역사를 앞에서 선도하고 안내하며 이끄는
선진적 이데올로기, 사상이 마련되어 있다면 인간은 그것이 비추는 밝은 빛을 따라
더 빠르고 고통 없이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여기서 이데올로기 상부구조의
역할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그것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인간은 (심지어는 자신이 개척하고자 하는 미래와
전혀 조응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과거 역사의 유산들 속에서 실천의 정신적
기초를 캐낼 수밖에 없게 된다. 역사의 분기점에서 때때로 이런 역설적인 현상들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급속하게 변동하기 시작하는 경제적 토대의 운동을 반영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 문명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변모시키고,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운동이 막 성장하는 바로 그 격변의 초입부에서, 불행하게도 자신의
진취성과 전진하고자 하는 의지에 부응하는 새로운 사상의 빛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미 잊혀져가고 있는 먼 과거의 망령들을 불러내 전진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며, 그들에게서 깃발의 구호와 총체적인 사상을 빌린다. 만일 이들의
운동이 진정으로 거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물러설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정당성을 갖고 있다면 이들은 낡은 과거의 망령들을 가지고도 세계사의
새로운 명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가령 낡은 봉건주의에 반대하면서 상승하는
자본주의를 대변했던 프로테스탄티즘의 창시자 루터는 수십세기 전의 가상 인물인
사도 바울로부터 옷을 빌렸으며, 1789-1814년의 프랑스 대혁명들은 고대 로마
민주공화국의 장식물을 머리에 걸쳤다. 비록 또다른 유형의 착취 체제에 불과한
자본주의 체제였지만, 그것이 수백년 동안 퇴적된 반동적 봉건 체제의 단단한
지반
을 뚫고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내전, 그리고 민족들 간의
전투가 야기하는 공포를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신념과 자기 확신이 필요했다.
떠오르는 부르주아 체제는 그것을 성경의 사도 바울에게서, 그리고 고대 로마
공화국의 이상과 신화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이는 현실을 냉철하고도 과학적으로
다룸으로써, 그 어떤 기만도 위장술도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지배의 정당성을
제시할 만큼 충분한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던 부르주아 혁명, 다시 말해 다수
인민을 자신들의 혁명의 깃발 아래 동원해야만 했지만 그럼에도 다수 인민을
해방시킬 수 없었고, 오히려 비참한 임금 노예로 내몰아야만 했기에 무덤들 속에
잠들어 있는 과거 영웅들의 옷을 도둑질해서 입어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실체를
역사적 인물의 후광으로 가려야만 했던 부르주아 혁명의 계급적 한계(즉 착취적
성격)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동일한 상황이 중동에서 일어났다. 왕정 타도와 제국주의 축출, 아랍 통일 국가
수립, 팔레스타인 독립과 같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요구를 내건 거센 운동이
60년대 이래 중동에서 발전했다. 이런 새로운 운동은 자신에게 걸맞는 사상과
이념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운동은 부르
주아 혁명의 한 지류였을 뿐이었다. 운동의 주체들은 보통의 민주주의자였거나
민족주의자였고, 좀 더 나아가봐야 사회주의의 외투를 걸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중동이 놓여 있는 세계적 연관을 고려할 때, 이들은 아주
빠른 시기 내에 '반동 착취자'로 전화될 것이었고, 부르주아화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과학적인 사상 대신 환상적인 장식물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들이
물려받은 역사적 재료는 다름 아니라 이슬람교였다. 그들은 이슬람교리 속에서
자신의 깃발을 장
식할 구호를 찾아내야만 했으며, 이슬람 역사의 영웅들 속에서 자신을 장식할
후광을 캐내야 했
다. 여기에 중동 인민들의 의지할 데 없는 고난의 삶이 가하는 영향력이
덧붙여졌다. 그리하여 점
차 잠들어가면서 고대 박물관에 처박힐 운명이었던 이슬람교가 부활해 사회의
전면에 재차 등장
했다. 인민의 아편으로서, 그리고 부르주아 혁명가들의 외투로서 이슬람교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았다. 이 종교의 생명력은 아편을 갈구하는 인민들이 증대하고, 부르주아 혁명의
기운이 60년대
이래 폭발적으로 성장하자 더욱 강력해졌고, 순식간에 중동 전역을 휘감았다. 모든
중동 국가들의
지배자들은 왕정이건, 신흥 부르주아 혁명 집단이건, 호메이니와 같은 이슬람
사제이건 관계없이
이슬람교를 자신의 지배의 근거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진보적인 운동에 의해 그것이 이용될 지라도, 낡은 사회의 망령이
긍정적인 역
할을 담당하는 시기는 대단히 짧다. 일시적으로 담당했던 역사적 소임이 끝나게
되면, 그것은 역
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반동의 손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약간의 시기가 흐르면
그것은 (마치 프로
테스탄티즘이 그랬듯이) 반동화된 지배자들의 지배 도구로 전락하며, 심지어는
(정통적인 기독교
원리주의가 그랬듯이) 성장하는 새로운 사회 체제와 격렬하게 충돌한다. 낡은
망령이 탄력성을 결
여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리고 이 망령의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의 발전 속도가
더디면 더딜수록, 마지막으로 이 망령의 힘을 빌린 지배자들이 반동화되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
록 그것은 앞으로 전진하는 힘들을 더욱 강력하게 가로막는다. 이슬람교가 지금
중동에서 담당하
고 있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이슬람교는 중동 노동자계급이 반드시 영향력을
거세시켜야 하는
반동적 요소이다.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은 '정치와 종교의 일치'라는 아주 반동적인 입장에
근거했기에 민주주의
를 확대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로막았으며, 심지어는 자본주의의 발전조차
거부하면서 과거의 낡은
고대 시대로 돌아가기를 꿈꾸는 반동적 소부르주아 운동을 원조했다. 이란
호메이니 시아파 정권
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구 왕정을 타도한 결과 수립된 이 체제는 민주주의 정부가
아니라 이슬
람 종교 사제장들의 권한을 증대시키고, 이슬람 종교 조직의 확대를 돕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
떤 정치적 자유도 유린하는 극단적인 반민주주의 정권이었다. 노동자 운동을
탄압하는 억압 이데
올로기이자, 중동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아편으로
이슬람교가 기능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은 극단적인 경우, 이슬람 교도들과 중동 인종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인간
들을 '사탄, 추방하고 타도해야 할 인종'으로 간주하는 초반동적 인종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바로
이런 극단적인 반동 이념을 토대로 유태인과 외국인들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테러리스트 집단
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후 다루겠지만 민중적 기초를 갖고 있는 대중운동으로서
PLO는 테러
리스트 운동 세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고대 유목 사회를 반영하는 이
이슬람교는 자본
주의 체제의 성장 -- 오직 이것만이 얽히고 섥힌 중동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할 수
있으며, 사회주의 혁명의 토대를 닦을 수 있다 -- 에 격렬하게 저항했고, 가로막고
있다. 나아가
서 그것은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중동의 제 국가들의 지배자들이 자신들
사이의 분쟁에
서 사용하는 편리한 도구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 수니파, 시아파의 대립으로
포장된 '이란 이라크
전쟁'이 그 단적인 예다. 중동에서 대중적인 노동자 운동의 탄생, 그리고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은 이슬람교라는 아편의 영향력에서 중동 선진 노동자들이 벗어날 수 있을
때만 비로소 본격
화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와 정치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과 같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이미 오
래 전에 해결된) 초보적인 민주주의 요구는 지금도 아랍 노동자계급이 내걸어야 할
제1의 요구
중 하나다.
중동을 비롯해 세계 전역에서 일어난 부르주아 혁명들과는 달리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은 과거
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오직 미래에 의지해서만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
사회주의 노동자 혁
명은 과거에서 유래한 모든 미신들, 그리고 고대 역사에서나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과거 영웅들로
부터 자신을 단절할 때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낡은 역사적 문구와 이념,
종교에 의지했던 초
기 부르주아 혁명과 달리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은 현실과 사회의 발전 경로에 대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투명한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과학적 사상으로도 충분하며, 오직
그것에 입각해서만
승리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혁명이 개척하고자 했던 미래 --
그것은 한 유
형의 착취(봉건적 착취)를 다른 유형의 착취(자본주의적 착취)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 와 달리
노동자 사회주의 혁명은 어떤 계급 지배도 없고 만인이 평등한 빛나는 미래로
인류를 인도하는
위대한 혁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혁명은 종교와 같은 인민의 아편 따위는
조금도 필요 없
으며, 그것을 역사의 박물관에 완전히 매장시켜 버릴 것이다.
경제적 토대로부터 바라본 중동 사회의 변천
중동의 경제적 토대를 검토할 때, 우리는 50년대 이래 이어진 중동 사회의
격동의 원인을 정확
히 해명할 수 있다. 오일 달러(석유 판매 수입)를 바탕으로 한 경제개발은 중동
사회의 계급적 관
계를 재편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소규모 농업 생산, 그보다 훨씬 더 저변화되어
있던 유목민들의
촌락 공동체에 기반한 사회 체제(대략 2000년 가까이 거의 변함없이 존속되어 왔던
그 끈질긴 보
수적 체제)가 상업과 국제 무역, 그리고 석유산업과 건설산업을 선두로 점차
도입되는 자본주의
공업에 의해 뿌리로부터 점차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경제 개발의 수익을 누리는
관료, 군인, 자본
가 층이 탄생했고, 다른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동안 꿈쩍도 하
지 않았던 폐쇄적인 중동 체제에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화로
정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