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 의한 평화'의 허망함
왜 뚫렸나... 기로에 선 미국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과 뉴욕이 '여객기' 공격으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인들은 물론 많은 세계인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그토록 위협을 강조하던 '미사일'도 아닌 '여객기'가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자랑하던 최첨단 장비와 고급 인력으로 무장한 정보망을 뚫고 세계자본주의의
중심과 미국의 군사 패권주의의 상징이 무너트렸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미국 정부가 전통적으로 내세워 온, 그리고 부시 행정부 들어 틈만
나면 외쳐온 '힘의 의한 평화'의 허망함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은 국가재난을
수습하기 위해 대통령을 중심으로 여야당과 국민들이 단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머지 않아 이번 사태의 큰 원인을 부시 행정부에서 찾는 목소리도 커질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출범이후 국제사회 및 미국 내 일부 여론을 무시하고 독선적이고
일방주의적 행태를 보여 안팎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미사일방어체제(MD)
강행, 기후변화 협약 탈퇴, 탄도미사일방어(ABM) 조약 일방적 파기 조짐,
생물학무기금지협약 검증의정서 거부, 소형무기 통제안 거부 등으로 미국은 스스로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 행정부의 중동평화협상의 성과를 무시하고 다시
이스라엘 편향적인 자세로 돌아섬으로써 아랍권 국가들과 국민들의 반발을 산 것이
이번 사건의 중대한 원인이었다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다.
왜 뚫렸나... 기로에 선 미국
미국이 이번 사건의 원인을 어디서 찾느냐에 따라 그 결과 역시 큰 차이를 낳을
수밖에 없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엄청난 충격이 휩싸인 미국 국민들을
납득시킬만한 조치와 향후 예방책을 제시해야 하는 큰 부담을 안게 됐다.
미국의 심장부가 뚫린 직접적인 원인은 이론의 여지없이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는
미국 정보체계의 허점이었다. 전쟁에 버금가는 테러를 준비하는 동안 아무런
정보도 입수하지 못한 정보기관은 일차적인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또한
테러범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공항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했다는 점과 피랍된
여객기가 '대량살상무기'로 사용되는 동안 미국의 경보·관제방공망이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점 역시 여론의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미국이 이번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이와 같이 '구멍난' 정보망에서 찾고 있는
만큼 정보 장비 및 인력 확충과 개선에 우선적인 주안점을 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단기적인 처방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이 직면한 위협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위협대상'을 둘러싼 미국 내 논란이
벌써부터 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도날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중심으로 한 부시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은 "미국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북한, 이란 등 깡패국가들로부터 제기되는 대량살상무기 및
탄도미사일 공격"이라고 규정하고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내세워왔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본토 방어'와 '예측하지 못한 공격'을
신국방전략의 근간으로 내세우며, 다양한 위협에 대비한 신무기 체계의 개발 및
군구조의 혁신, 본토 및 해외주둔 미군 방어를 위한 MD 구축 등을 주창하면서
국방예산과 관련 기술의 우선적인 투입을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러한 부시 행정부의 신국방전략은 도마위에 오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부시 행정부가 깡패국가들의 미사일 위협을 가장 큰 위협이라고 주장해온 반면에,
민주당과 언론은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미사일 위협보다는 반미테러집단의
국제테러가 더 큰 위협"이라며 MD 구축보다는 테러 대비에 주안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따라서 미국의 심장부가 뚫린 이번 사건을 계기로 MD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MD 구축이 더욱 절실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제기될 것이다. 우선
미국이 이번 테러 사건으로 인해 MD 계획에 차질을 빚는다면 "이는
테러리스트들에게 무릅을 꿇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될 것이다. 또한 MD가 '본토
방어'와 '예측하지 못한 공격'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되어온 만큼, 반미
테러집단이 예상 밖의 미사일 공격을 감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될
것이다. 비록 '미사일'은 아니었으나, 이번 '여객기' 공격 테러는 역설적으로 MD의
필요성을 입증시켜주고 있다는 것이다.
MD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변수는 그동안 MD에 대한 반대 입장을 보여온 국제사회가
처참한 테러를 당한 미국에게 예전만큼 반대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냐는 점에
있다. '초상집에 가서 빚 독촉 하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중국, 러시아 등은
당분간 미국 정부를 자극할 수 있는 언행을 자제할 것이다. 동시에 러시아, 중국과
MD 협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은 '이번 사건을 통해 테러집단이나 깡패국가들이 어떤
수단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됐다'며 한층 더 강하게 밀어붙일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미국은 보다 근본적인 반성을...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이 기회에 미국식 '힘에 의한 평화'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와 힘을 앞세운
일방주의적 외교, 그리고 미국식 사고와 체제를 전세계에 강요하려는 태도로는
세계는 물론 미국의 평화도 지킬 수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돈과 기술, 그리고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안보를 추구하려는 사고방식으로
지금보다 더욱 강력한 군사력과 정보력을 갖출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는 또다시
증오와 대결, 그리고 더욱 다양하고 대담하며 정교한 테러 방식을 부추길 뿐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테러전문가가 "여객기 납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모든
항공기의 출항을 금지시키는 것외는 없다"고 지적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방법으로 군사력에 기초한 힘을 키우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안보를 위한 노력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국가의 안보를 불안하게 함으로써 이 국가 역시 국가안보 강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강구케 하고 이는 또다시 상대 국가의 안보 불안을 가져오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만든다. 남북한 관계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를 겪으며 미국이 가장 절실한 교훈은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와
힘에 의한 외교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자기반성일 것이다. 안보딜레마를 푸는
방법은 보다 근본적인 방법은 위협의 근원 자체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군사력의 행사가 아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일정한 양보도 마다하지
않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평화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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